[토박이말 살리기] 버림치

 

여름이 가고 가을로 접어들 무렵 산들산들 부는 바람을 ‘건들바람’이라고 한답니다. 이 건들바람이 부는 무렵에 든 장마라서 가을장마를 ‘건들장마’라고 한다는 것을 앞서 이 자리에서 알려드린 적이 있는데 생각이 나시는 분이 계실 거라 믿습니다. 날씨를 알려 주는 분들이 ‘가을장마’가 이어지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을 듣는 요즘입니다. 그 분들의 입에서 ‘건들장마’라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곤 합니다.

그야말로 비가 여러 날 동안 오고 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비가 내리는 가운데 비옷을 입으신 두 어르신께서 비에 젖은 종이를 실은 수레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가시는 것을 봤습니다.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이른바 ‘폐지’를 줍는 어르신을 보며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리고 버려진 종이 또는 남이 버린 종이를 ‘폐지’라는 말 말고는 쓸 말이 없는 우리 말글살이까지 생각하니 마음이 더 안 좋았습니다.

 

흔히 ‘폐지’라고 하는 것을 사는 곳에 가면 ‘파지 수집’이라는 말을 써 붙여 놓은 걸 본 적이 있는데 다들 이렇게 많이 쓰는 ‘파지’, ‘폐지’를 갈음할 토박이말은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폐품’이라는 말은 자주 보거나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모르시는 분도 거의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폐품’과 비슷한 뜻을 가진 토박이말이 있는데 그 말을 듣거나 보신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폐품’과 뜻이 비슷한 토박이말은 ‘버림치’랍니다.

 

‘폐품’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못 쓰게 되어 버린 물품’이라고 풀이를 해 놓았습니다. 비슷한 말로는 ‘쓰레기’, ‘폐물’, ‘파치’가 있다고 해 놓았구요. 하지만 비슷한 뜻을 가진 말에 ‘버림치’가 있다는 것은 알려 주지 않고 있습니다. ‘버림치’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못 쓰게 되어 버려 둔 물건’이라고 풀이를 해 놓았으면서 말입니다. ‘폐품’을 찾았을 때 ‘버림치’가 비슷한 말이라는 것을 알려만 줘도 아마 많은 사람들이 ‘폐품’이라는 말을 써야 할 때 ‘버림치’라는 말을 떠올려 쓸 거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이 ‘버림치’라는 말을 알고 쓴다면 ‘폐지’, ‘파지’라는 말을 갈음해 쓸 수 있는 토박이말이 없지만 새로운 말을 쉽게 만들어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폐지’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쓰고 버린 종이’라고 풀이를 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버린 종이’입니다. ‘버린 물건’을 ‘버림치’라고 했으니 ‘버린 종이’는 ‘버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버림치’라는 토박이말과 말의 짜임이 ‘버림+치’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버린’의 뜻을 가진 ‘폐-’가 들어간 말들을 갈음해 쓸 수 있는 새로운 말을 얼마든지 만들어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폐수’는 ‘버림물’이라고 하면 되고 ‘폐가’는 ‘버림집’이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사전에서 ‘버림-’이 들어가 있는 말과 ‘폐-’가 들어가 있는 말을 세어 보면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못 쓰는 토박이말이 가진 보이지 않는 이런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토박이말을 넉넉하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얼른 마련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힘과 슬기를 보태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토박이말에 마음을 써 봐 주시고 좋아해 주시며 둘레 사람들에게 나눠 주시는 여러분 모두 고맙습니다. 

 

4354해 들가을달 스무엿새 낫날(2021년 8월 26일 목요일)바람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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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경남일보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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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이: 토박이말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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